
한국의 ‘붉은 악마’ 축구 유니폼을 입은 곱슬머리의 한 백인 학생이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안녕, 난 용준이야” 하고 인사를 건넨다.
외국인 특유의 억양도 없고 아주 자연스러운 발음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용준이라고 소개하는 모습이 성큼 정겹게 다가선다.
왜 자신을 용준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배용준은 아주 유명한 한류스타이기 때문에 그 이름이 마음에 든다고 들뜬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러곤 원래부터 자신은 한국 사람이었던 것처럼 능숙한 한국말로 대화를 한다.
역시 영어가 모국어라 한국어 구사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너무 잘해서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최신 한국 음악과 드라마, 영화도 종류 별로 다 꿰고 있다.
여느 한국 학생들과 다르지 않은 이 친구, 아담 쉬어드(Adam Sheard)는 겉모습은 백인이지만 사고방식부터 행동거지까지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다르다.
현재 UBC 석사 과정인 아담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는 댄스가수 노라조이고 가장 좋아하는 연예인은 김태희와 손담비다. 무엇이 이처럼 그가 한국을 사랑하게 만들었을까?
아담은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국제학생들과 교류할 수 있는 봉사활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다른 문화를 넓은 마음으로 포용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망은 새로운 세계로의 진출, 색다른 경험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봉사활동 경험은 물론 그에게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 다른 다양한 문화권에 대해서도 알게 해주었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감명을 준 나라는 한국이다.
“한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에 대해서 굉장히 큰 자존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학생들은 끊임없이 한국 음악이나 드라마를 자랑스럽게 추천하면서 자신들의 문화가 얼마나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지 알리려고 노력합니다.
특별한 애국심이죠.”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자연스레 한국 영화를 보게 되었고, 그는 <엽기적인 그녀>를 통해 더욱 진한 한국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엽기적인 그녀>는 남자가 주도권을 가지며 여자는 수동적으로 그려지는 많은 다른 영화들에 반해, 전혀 새로운 시도를 보인 유쾌하고 즐거운 영화다.
아담은 이 영화를 통해서 한국인들의 무궁무진한 아이디어와 독창성, 무엇보다도 한국인들만의 솔직 담백함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때부터였을까, 아담은 좀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고 싶었고 점차 한국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아니 더 나아가 언제부턴가 김치를 아무렇지 않게 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스스로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2006년 아담은 자신의 일생에 한 획을 긋게 될 중대한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한국의 연세대학교 교환학생으로 가는 것이었다.
한국에서의 2년 간은 그에게 한국어라는 소중한 선물을 안겨주었으며 앞으로 그의 인생에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의미 있는 꿈과 포부를 심어주었다.
처음에는 물론 한국말이 어눌하고 서툴렀다. 대학에서 한국어를 배우기는 했지만 그야말로 본토 한국인에 비하면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1학년생과 다름없었다.
한국어를 배우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동시에 상당히 즐거운 일이었다.
매일매일 새로운 단어와 표현을 습득하기 위해 한국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뉴스를 보았고 그들이 하는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했다. 드라마 <봄의 왈츠>에 나오는 혼혈배우 다니엘 헤니가 약간 어색한 억양으로 열심히 한국말로 연기하는 장면이 나오면 가슴 깊이 형제애가 샘 솟기도 했다.
아담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고 그의 한국어 실력은 정말 수준급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볼멘소리로 말한다. “사건은 너무나도 발음하기 힘든 단어야. 한국 친구가 이 단어를 적어도 다섯 번이나 말한 후에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거든!” 그리곤 다시 한 번 중얼거린다. “삭언, 삭언…”
어느 날 아담은 서울 거리를 지나면서 굉장히 특별하고 재미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때 마침 길 거리를 막고 패션쇼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입구의 경비가 삼엄한 것으로 보아 쉽게 접할 수 없는 유명 디자이너의 패션쇼인 듯 보였다.
하지만 아담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패션쇼 장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 때 한 경비원이 “가족분! 가족분!” 하며 외치기 시작했다. 아담은 왜 자신을 부르는지 의아했지만 질문을 할 새도 없었고 그 경비원은 아담에게 가족분들이 방금 들어가셨으니 빨리 뒤따르라고 입구로 안내해주었다.
그러곤 앞자리 몇 번째라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그 자리는 VIP들을 위한 특별한 좌석으로 패션쇼 무대 바로 앞, 아무 일반인들이나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사연은 이러했다. 아담이 앉은 줄에는 패션쇼에 초대 받은 아주 중요한 독일 외교관 가족들이 앉아 있었는데 경비원은 아담이 백인이기에 무조건 그 가족인 줄만 알고 얼른 패션쇼 장 안으로 들여보낸 것이다.
아담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바로 옆에 앉아 있던 한국 사람에게 씩씩하게 한국말로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그 사람은 아담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며 “나는 원빈이야” 라고 대답했는데 당시만 해도 아담은 한국이름은 무조건 세 글자여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너 이름 참 이상하다.
네 이름에는 왜 성이 없니?”라고 되물었다. 당황한 원빈은 “내 이름이 원래 원빈인데...”하며 어색하게 웃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담은 그가 한국에서 얼마나 유명한 수퍼스타인지 알게 되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그때 원빈과 함께 기념 사진이라도 찍었을 텐데 말이죠” 아담은 지금도 영 아쉬운 눈치다.
또한 아담에게 있어 한국은 바로 빨강색이다. 아담은 말한다, 한국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뜨거운 불 같은 무언가가 있다고. 뜨거운 열정과 애국심 그리고 따뜻함이 한국을 빨강색으로 정의하는 이유다.
그리고 갑자기 무언가가 더 떠오른 듯이 웃으며 말한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 축구를 참 좋아해요. 월드컵을 응원할 때 모두 ‘비 더 레즈 (Be the Reds)’ 라고 쓰여진 빨강색 셔츠를 입고 함께 모여 응원을 하는데 그러한 열정과 공동체 의식이 참 보기 좋아요.” 그러면서 한국인의 따뜻함에 대해 끝없이 얘기를 이어간다.
아담이 한국에 있었을 때 잠실동에 살았는데 어느 날 공원을 지나가다 포장마차에서 무언가를 파는 것을 발견했다.
아담은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곧바로 한국의 길거리 음식체험을 해보기로 했다.
눈길을 끈 것은 다름아닌 붕어빵이었는데 그 당시 아담은 ‘생선’이라는 단어는 알았지만 ‘붕어’라는 단어는 몰랐다. “생선빵 1000원어치 주세요!” 그러자 아주머니는 아담이 너무 귀엽다면서 “옛다, 10개. 다섯 개는 덤!”이라고 말씀하셨다.
엄청난 파격대우였다. 이후 아담은 그 자리에서 종종 붕어빵을 사먹곤 했는데 아주머니는 항상 1000원에 붕어빵 10개를 주셨다. “한국인의 인심, 따뜻함, 너무 좋아!”
그렇지만 그에게도 도저히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한국의 사회구조 같은 것인데, 예를 들어 대학 안에서 남자 선배가 아무렇지도 않게 저보다 나이 어린 후배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것 등이다.
“나이가 많든 적든, 위든 아래든 사람은 모두 평등합니다. 높은 위치라는 것이 곧 누군가에게 무력의 힘을 가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서로 아끼고 존중해주는 모습이 더 보기 좋아요.”
아담은 한국에서 얻은 좋은 추억과 경험에 대해 꼭 보답하고 싶다고 말한다. 한국 문화를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한국을 알리고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언제든지 나설 준비가 되어 있다.
실제로 아담은 현재 밴쿠버의 한국 유학생과 이민자 들이 빨리 적응하고 성공할 수 있도록 돕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영어공부뿐만 아니라 밴쿠버의 명소라든지 학교소개 등 각종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블로그( www.vancouverblog.net )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내년 여름에는 회사 일로 다시 한국을 방문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순대볶음, 한국에 돌아가면 그리운 친구들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맵고 맛있는 신림동 순대볶음과 함께 소주 한 잔 기울이고 싶다.
“한국의 매력은 한 가지로 한정되지 않아요. 한국의 문화 전체가 매력적이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한국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뉴스나 신문을 보면 온통 안 좋은 이야기투성이예요.
안 좋은 소식들은 항상 좋은 소식들보다 빨리 퍼지고 사람들의 뇌리에 오랫동안 박혀요.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한국 하면 북한을 떠올리잖아요. ‘비’ 같은 한류스타가 할리우드에서 열심히 활동해서 한국의 좋은 면모를 알린다면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떠올리게 될 거예요.
한국이 얼마나 멋진 나란데요! 그리고 나도 한국을 열심히 알릴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정말 정말 한국을 사랑하니까요.”
아담과의 이 유쾌한 대화는 모두 한국말로 진행되었다.
글, 사진=밴쿠버 중앙일보 김예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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